노동자와 회사의 관계는 서로 필요한 것을 충족해주며 상생하는 것이다. 회사가 나를 필요로 하고, 나도 회사를 필요로 하기 때문에 계약을 통해 관계를 맺는다.
개발자로 전향한 뒤, 처음엔 나쁜 회사에 들어가서 성장은 했지만 번아웃이 너무 심하게 온 나머지 이후 커리어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개발 일이 잘 맞아서 당시에도 업무 자체로 스트레스 받은 일은 정말 단 한번도 없다고 단언할 수 있지만 업무 외적인 일들이 많이 힘들었다.
조금 긴 휴식기를 보낸 뒤 최근에 좋은 회사로 이직을 했다.
나쁜 회사 썰
신입 때 처음 들어갔던 회사는 많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일일히 적자면 끝도 없어서 사실만 나열한다.
중간 관리자가 전혀 없이, 대표 아래에 바로 사원으로 이루어짐 (직원 30~40명 가량)
퇴사율이 높고 항상 신입만 채용함
IT 회사 치고 기술 수준이 매우 얄팍함
직원은 도구일 뿐이며 내 덕분에 월급을 겨우 받아갈 수 있다는 견해를 가진 대표
이 견해를 숨길 생각이 없음
연봉 협상(후려치기)에 적극적으로 활용함
최소 인력 유지: 동종업계 개발팀 규모가 평균 10~20명이었는데, 이 회사는 2명으로 2년 이상 유지함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특수한 장점이 하나 있었는데, 본인은 이것 때문에 3년 조금 넘게 다니게 됐다.
신입에게 어떤 중요한 임무든 그냥 맡김. 개발 그거 그냥 아무나 시키면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오만함도 가졌고, 신입한테 그냥 맡겨버리는 대범함도 있었다.
신입으로 들어가서 밑바닥부터 서비스를 개발하고, 운영을 했다. 결제라든지 심각도가 높은 분야도 그냥 다 시켰고, 금융감독원으로부터 업무 라이센스 취득을 위한 서류 준비부터 실사까지 맡았다. 결국 본인 재량껏 개발할 수 있었다. 신입이 개발한거라 수준이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개발단에서는 별다른 사고 없이 잘 운영되었다. (IDC에 불이 나서 3일간 서비스 못한 적은 있음) 퇴사한 이후에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아서 잘 몰랐지만 최근에 영업이익 공시 자료 보니까 매년 수십 억씩 나오고 있었다. 그 당시에 잘 만들어둔게 최근에 운 좋게 좀 더 터져서 부자되셨을 것 같다.
좀 똘똘한 직원들은 반 년도 못 채우고 퇴사하기도 했고, 보통 1-2년 정도만에 퇴사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도 많은 업무들을 겪어봤고 그쯤 돼서 퇴사하기를 잘 했다고 생각한다. 사업이 잘 됐으니 성공한 회사라고 볼 수 있지만 개발자에게는 거의 최악의 회사에 가깝다고 평가한다.
좋은 회사 썰
원래 기대치는 상당히 낮게 두는 편이다. 그래서인지 이직한 회사는 모든 부분에서 예상보다 좋았다.
먼저 임직원들 인성이 좋았다. 사장님부터도 면접 때부터 느꼈지만 말씀 자체를 조심하셨다. 입사 후에는 잘 뵙기 힘들었지만 두 번이나 시간 내주셔서 회사와 조직, 제품 설명도 해주시고 개인적인 대화도 많이 나눴다. 회사와 구성원 사이의 필요 관계에 대해 이해하고, 서로 공생하는 관계임을 인정하는 견해를 가지신 듯했다. 업무 외적인 것은 회사에서 최대한 배려해줄 것이고 결국 일만 잘 해주면 된다고 하셨다.
회사 차원에서도 신규 입사자에 대한 배려가 많았다. 첫 날 어색할 때 인사팀 직원이 커피도 사주셨고, 각 부서 임원들이 모두 시간 내서 OJT를 해주셨다. 개발팀에서도 윗선에서부터 개발팀장님까지 각각 조직 소개나 개발 문화 소개, 업무 소개 등을 해주셨다.
회사 사람들이 다들 성품이 좋아보였다. 대표님이나 사장님이 좋은 분이시다보니 아마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이 모여서 회사가 구성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 잘 대해주었고 금방 편안하게 적응할 수 있었다. 모난 사람이 없었다.
이곳에서 결국 강조되는 것은 업무 그 자체이다. 말 그대로 일만 잘하면 다른 걱정할 것은 없어보인다. 예전부터 그랬지만 개발 업무 자체 때문에 힘든 적이 없었다. 일에는 자신감이 있다. 아직은 조금 파악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지만 조금만 지나도 1인분 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인 목표는 빠른 시일 내에 한 1.5인분 정도 하는 것이다.
경력직이긴 하지만 원래 한 달 정도는 교육 및 테스트 기간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개발팀장님과의 첫번째 코드리뷰 이후에 더 필요가 없다고 보셨는지 입사 일주일 만에 바로 업무에 투입되기로 했다. 아직은 배려차원에서인지 간단한 업무만 받고 있지만 사실 어떤 업무를 주더라도 다 감당할 수 있겠다는 자신은 있다.
단기 목표
어차피 프로는 업무로 증명하게 될 것이다. 여기서는 사람들도 다들 잘 해주시고,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부분이 많다. 이 모든 배려들이 결국 가까운 미래에 좋은 퍼포먼스를 내줄 것을 담보로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단기적으로는 회사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이 첫번째 목표다. 아직은 배려 차원에서 업무를 적게 배정받고 있지만 조만간 어떤 제품이나 서비스를 책임지게 된다고 했을 때 감당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완벽히 1인분을 해내는데 걸리는 기간을 최대한 단축하는게 목표이다.
현재 일부분 맡고 있는 제품이 있는데 이쪽 구조를 최대한 파악하고 있다. 소스코드는 대강 다 읽어봤고 곧 세부적인 부분까지 일일히 다 읽어볼 수 있을 것 같다. 서비스 구조나 배포 환경도 어느 정도 파악해뒀다.
종합적으로 판단했을 때, 단기적으로 주어진 업무를 시간적으로 최대한 단축하는 것을 목표하고자 한다. 당분간 맡게 될 업무들은 모두 ‘가능’ 범위에 있다. 소스코드 볼 줄 알고, 필요한 기능 추가하거나 수정할 줄 알고, 변경 사항 반영하고 배포할 줄 알고 인프라 구축할 줄도 안다. 그래서 어차피 모두 할 수 있는 일들이니, 책임감 있게 완수하되 소요 시간을 최대한 줄여서 일을 더 믿고 맡길 수 있겠다는 확신을 주고자 한다.
장기 목표
장기적으로는 개발자로서 성장이 필요하다. 점점 책임과 권한이 늘게 되면 언젠가는 서비스 자체를 설계하게 될 수 있고, 이후에는 점점 더 큰 그림에서 일을 하게 될 것이다.
일단 매월 1회 정도 주말 중 하루를 잡아서, “개발의 날"로 지정하고 하루 종일 개발에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배우자와 상의하고 동의를 얻음). 스터디가 필요한 주제가 생기면 기록해두고, 필요한 역량을 키울 수 있는 여러가지 사이드 프로젝트를 생각해뒀다가 개발의 날마다 정리하고 지식을 습득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다행히 이번 회사는 지난 번과는 다르게 기분 좋게 퇴근할 수 있고, 여가 시간에 개발과 공부를 할 수 있을만큼 정신적인 체력이 남아있기 때문에 꾸준히 시간을 들여서 정진하다보면 더 성장할 수 있을 거라고 기대한다.
마무리
개발로 전직한 것도 늦은 편이고 휴직기도 길어서 나이에 비해 경력이 짧다. 이직을 하게 되면서 자신을 더 발전시킬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며 이 글을 작성했다. 목표치는 높게 잡았다. 나와 비슷한 3-4년 경력자들이 아니라 내 나이대 개발자들(10년 전후)을 목표로, 그 중에서도 평균 이상의 실력자들을 목표로 하고자 한다. 나는 개발을 좋아하고, 개발이 재밌게 느껴진다는 강점을 가지고 있다. 주어진 현실에서 최선을 다해 노력을 다짐해본다.